한겨레신문 (21세기를 여는 열쇠)

차세대 표준을 잡아라

헤르메스21 2011. 3. 3. 05:42

[21세기를여는열쇠] 차세대 표준을 잡아라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 결과 오늘날에도 수많은 신제품과 갖가지 첨단기술들이 속속 눈앞에 선보이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것들이 나올 때마다, 연구개발 경쟁 못지 않게 해당 기업과 국가 등이 사활을 걸고 경쟁하는 것이 또 하나가 있다. 곧 제품의 규격 및 기술방식의 `표준화'를 둘러 싼 경쟁이다. 자신의 방식이 업계의 표준으로 정착되면, 다른 기업이나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료(로열티)를 지급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것이다.

신제품의 표준방식은 기술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으로 결정돼야 마땅할 것이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70년대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의 표준방식을 둘러싼 경쟁이다. 당시 소니의 베타방식은 기술적으로 우수한 측면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쓰시타가 주축이 된 VHS방식에 밀려났고, 이후 이 방식이 지금껏 세계 표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VCR 표준에 관한 경쟁에서 최종 심판관의 노릇을 했던 것이 미국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사 등 소프트웨어 공급업체라고 볼 수 있다.

큰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를 모아왔던 차세대 영상매체인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DVD)도 예상만큼 빠르게 보급되지 못하고 있다.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불법복제 방지 등의 요건들을 내세우며 제품의 규격과 방식 등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주요 영화사 등 소프트웨어 공급업계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업계의 `권력이동'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 동안 도스, 윈도 등의 컴퓨터 운영체계, 인터넷의 표준화 등에서 보였듯이, 미국은 신기술의 개발 못지 않게 자신의 방식을 세계 표준으로 만들어 나아가는 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닌 듯하다. 미국이 여전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데에는, 바로 이러한 표준화의 힘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 디지털 텔레비전, IMT2000이라 불리는 차세대 이동통신, 지금보다 천배 이상 빠른 차세대 인터넷 등 여러 차세대 기술들이 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연구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 못지 않게, 차세대 표준을 정하는 과정에서 뒤처지거나 소외돼 나중에 뒷북치는 일이 없도록 초기단계부터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최성우(과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