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과학기술인들은 실험실에서 연구개발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려 애쓰고 있지만, 이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인에 대한 관심과 대접이 인색해졌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갈수록 심해지고 마땅한 개선책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거다.
나라의 장래에 암운을 드리울 수도 있는 심각한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해 한때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이제는 만성이 되었는지 예전과 달리 위기의식도 사라지고 해결 노력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정부 독립부처로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온 과학기술부는 다른 부처로 통폐합되어 사라졌다. 다행히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새롭게 상설화된다고는 하지만, 최근의 과학벨트 선정 논란에서도 정작 과학기술인들의 입장은 뒷전으로 밀리는 모양새다.
이런 와중에, 이른바 ‘과학평론가’라는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히 고민되었다. 물론 그동안 나름 분주하게 활동을 하기는 했다. 민간기업의 연구소장이나 임원으로 있으면서 연구개발과 컨설팅을 해왔고, 이공계 기피현상의 극복을 위해 현장 과학기술인들의 열기를 모아 2002년 초에 탄생한 ‘한국과학기술인연합’(www.scieng.net)의 운영위원으로서 적지 않은 일도 했다. 한편으로는 대통령 자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부 평가위원회 등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자문과 관련하여 각종 활동에 참여하면서 상당히 ‘과분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내는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는 나로서는 『과학사 X파일』(1999),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2002)에 이어서 세 번째로 내는 책이 된다. 그간 출판사의 기획도서에 필진으로 참여하거나 공저 비슷한 형식으로 나간 책은 몇 권 되지만, 단독 저서로는 무척 오랜만에 내는 셈이다.
주변 지인들 중에서 “왜 책을 더 내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었고 그동안 개인적인 사정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로 분주하기도 하였지만, 꼭 바쁘거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지난 9년 동안 책을 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첫 책을 낼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과학평론가나 과학저널리스트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뛰어난 분들이 적지 않게 활동을 하고 좋은 책들도 많이 나오는 마당에, 꼭 내가 책을 더 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 점도 있다. 또 그동안 내가 관련된 조직과 분야에서 여러 활동을 하다 보니 과학기술정책이나 이와 관련된 이슈와 문제 등이 나의 주된 관심사가 된 탓도 있겠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이른바 ‘쉽고 재미있는 과학’이 과학의 대중화 및 과학출판을 포함한 과학문화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는 요즘의 주장들과 분위기에 대하여, 나는 몹시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서 과학에 대한 글을 일부러 ‘어렵고 재미없게’ 쓸 이유야 없겠지만, 과연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는 과학문화가 부족해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화되고 과학기술계가 홀대받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다수 우수 학생들이 의학계, 법학계로만 몰려가는 이유는 법학이나 의학이 쉽고 재미있는 학문이기 때문인 걸까? 너무 과민한 건지도 모르겠으나, 쉽고 재미있는 과학만을 강조하면서 각종 이벤트나 전시성 행사 등으로 과학문화를 치장하는 것은 도리어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막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과학문화에 회의적인 과학저널리스트’는 어쩔 수 없는 고민스런 결과겠지만, 슬픈 자화상이자 자기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쉽든 어렵든, 재미가 있든 없든, 타 분야의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과학기술의 모습을 제대로 알리고 과학기술과 사회 등에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이번에 다시금 책을 펴내게 되었다. 나에게는 “시지프스”의 과업과도 같은 일인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욱 더 과학기술인들이 사회적 발언과 활동을 강화하여 스스로 입지를 찾고, 과학기술이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다른 부문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대중들에게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는 여기에도 초점을 맞추면서, 미래 과학기술의 방향 등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학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 제대로 알려면, 과거 어디에서 왔으며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여러모로 고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내가 첫 번째 책의 서문에서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을 빌어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구절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 진정으로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그 후로도 무척 많았는데, 구체적인 사례들도 이번 책에 함께 담았다. 이로 인하여 이번 글 중에 불가피하게 예전 책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거나 같은 소재를 다시 언급한 것들도 있어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요즘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용어가 자주 쓰이는데, 외람될지 모르나 어찌 보면 그간의 나의 행적과 이번 책이 바로 이와도 상당히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번 책이 과학기술정책을 본격적으로 논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해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번 책을 내면서도 역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내가 운영위원으로 몸 담아 온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의 회원과 운영진께 먼저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이곳의 온라인 게시판 등에서 활발히 토론된 주장과 내용들이 이 책에도 적지 않게 반영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일간신문, 잡지, 온라인 매체와 웹진 등으로 그동안 지면과 기회를 제공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이번 책에 그동안 써온 칼럼 글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거나, 똑같지는 않더라도 거기서 주장했던 문제의식 등이 반영되어 있는 것들도 많다. 문중양 선배님을 비롯하여, 책에 나오는 사진과 이미지를 제공해주거나 협조해준 분들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며, 처음 책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논의하면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출판사 편집팀에도 감사를 드린다.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함께 하면서 곁을 지켜준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고맙고, 마지막으로 거의 평생을 그리 잘나지 못한 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하시다가 몇 년 전 나란히 눈을 감으신 부모님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2011년 2월 정릉에서
최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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